2022. 6. 10. 02:53

 

 

▶ 2차창작 개인 연성 : 세포신곡. BL. 란무테란.

 

 

나는 하라다 무테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혹여나 우습다고 생각했을까? 물론 그럴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당연히 이러한 시대에 그 이름을 모르기는 어렵겠지. 그러나 언젠가 이 기록이 그대에게 있어 그를 이해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 아마 이 이야기가 언제 읽혀진다 해도, 1년 후라도, 10년 후, 설령 100년 후에도 이 문명이 이어진다 하더라도! 당연하다면 당연할 정도로 그는 명백하고, 또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을 것을 나는 믿어.

 

그렇다면 이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사태에 대한 설명이 선행되어야겠지. 인간이 세운 바벨탑은 무너졌다.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은 단숨에 자취를 감추고, 많은 이들이 당장의 삶을 어떻게 연명하느냐. 어떻게 살아 가느냐를 논하기 바쁘다. 여느 사회가 그러했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시체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거든. B급 영화라고 생각했을 테지! 물론 그럴 수 있을 법한 문제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미지의 것을 목도하고, 발견하였으며, 그에 따른 대가를 철저하게 치르지 않았던가?

 

그것을 앎에도 손을 대는 것이 인간이다. 독마저 정복하여, 혹은 배제하여 취식하게 된 것도 인간이다. 개량을 통해 먹을 수 없는 것을 먹게 된 것 역시 인간이지. 불치의 병을 극복했다면 그 이후에 등장할 것이 불치가 되리라는 각오 정도는 하는 것이 만능이라 과학을 드높인 자들의 몫이 아닌가 한다.

 

자업자득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또한 궁금하겠지.

 

있었지, 물론이야! 과거형인 이유는 자네 역시 예상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아무리 소리 높여 귀책 사유를 물더라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이미 변해버린 자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주장 역시 없는 건 아니었으나…… 상상할 수 있다면, 상상해 보길 바라. 시체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걸 숨을 쉬는 인간들이 일제히 알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어디선가부터 시작했다면, 그 시발점을 파악하는 것조차 불투명하다.

 

사람은 이 순간에도 태어나고, 죽어갈 터. 평범한 사死를 두고 사람을 욕되게 하겠는가? 모든 것을 두고 어떠한 병증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처음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나 ‘어디에서부터 관측이 가능했는가’ 정도일 뿐,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분야에 지나지 않아. 누군가를 쉬이 화형대에 올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지! 결국 사람의 입은 당장 살아남아야만 하기에 막히고 만다. 그러나 몇몇 죽은 자는 이미 관 속에서 몸을 일으켰고, 생자를 포식의 대상으로 삼았다. 삽시간에 퍼지는 사태에서 쥔 펜을 놓고 연구실로 들어선 의사의 이름이 그였지. 하라다 무테이. 그는 의사였으나, 이 사태가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펜을 조금 더 쥐는 이라는 평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였음이 생생해.

 

사람의 그릇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가 분명하다고. 범재도, 수재도 아닌 천재. 천재라 해도 그 모습은 인간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모습이 분명했음을 떠올린다. 익숙한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던 순간 나 역시 그렇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그렇게나 쉬이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며, 두각을 내세울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면 나의 진심이 전해질까. 나는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이었음에도 말이야. 다시 만날 수 없던 귀하고 귀한 것을 다시 손에 쥐었을 때와 닮은 순간이 생생해. 전해지지 않더라도 무관계하지만, 분명 아쉬울 거야. 그 순간을 필히 자네는 알 수 없겠지. 그 누구도 그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말하니까.

 

어째서지? 언제나 그는 그 자리에 있다.

그대가 사용하던 연구실은 아직도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자리에 선 사람들은 모두 알아챈 눈을 하고 미쳐버리고 만다. 나는 그렇지 않아. 온전하게 그대를 보고 있지. 그것이 설령…….

 

아아, 이것이 편지가 아님을 잠시 망각하고 만 점은 용서해주겠어? 그래, 마저 이어야지! 그래야지.

 

내게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연구실에서 그를 다시 마주 했을 적에는 꽤나 즐거웠더랬지, 아마. 노아는 어떻게든 방주를 만들어내 그 안에 선택된 정결한 짐승을 쌍을 이루어 태웠다고 했나. 하늘의 명에 따라 배를 만들고 가족과 정결한 짐승을 암수 쌍을 이루어 일곱 마리씩, 부정한 암수는 한 마리씩. 혹은 두 마리씩. 그리고 새 암수 일곱 마리씩을 방주에 함께 실었다는 옛이야기와 같이. 우리는 그 방주에서 흔들리는 사이에서도 견고하게, 흔들리는 파도 안에서 넘실거리면서도 어찌 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의 모양을 하게 된다. 랜들 선생의 아래,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하던 이들은 또 다시금 하라다 무테이의 존재에 모였다.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단언하지.

아직 모든 건 끝나지 않았어.

 

한 번 움튼 것은 생과 사의 경계를 기어이는 흐려냈다. 세계를 뒤덮은 이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아. 당연한 일이라 여기면서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한 순간에 쓸어버리고 만 것을 야금야금 갉작이고 좀먹으며 해결하는 게 우리의 한계였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해독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도 무수히 많다. 우리에게 남긴 과제마저 해결하지 못하고 말았어. 그러나 인류는 여전하다. 훌륭하게 살아남았다! 이전의 틀이라 해도 무너지지 않은 것 만으로도 충분히 찬사를 받을 법은 하지 않나?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바벨탑은 무너졌지. 그러나 인류는 다시금 살기 위해 바벨을 세우는 것과 같이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어. 쉬운 건 어디에도 없으나 우리는 그렇게 그 날의 틀을 다졌다. 해석되지 않은 무수한 인자 사이에서도 그나마 오랜 시간을 지성을 잃은, 본능 뿐인 존재로 전락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서였겠지.

 

그리고 하라다 무테이, 그는. 그 가장 처음에 세워진 바벨의 주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고 나는 생각해. 이쯤이면 말해야겠지. 우리의 연구에 대해서. 나와 그, 우리들은 특이한 체질과 이에 대한 면역을 알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참으로 잔인하면서도 엄연할 만큼이나 무기질적인 빛을 내는 사람이어서 나는 생각했다.

 

저 남자의 한계를 반드시 한 번 보고 싶다, 고 말이야.

 

 

 

◯×

 

 

 

깜박. 깜박.

 

어떠한 이름이 매겨져 있지 않은 연구실을 앞에 둔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한다. 하얗기만 한 건물은 어쩌면 병적이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고 말지. 그러나 남자는 유난할 정도의 색을 드리웠고,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결코 옅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아주 진한 원색이라 할 수도 없었을 터다. 이제 막 도착한 지 며칠이나 되었을지. 인간은 유사시에 도리어 환경에 적응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마치 처음부터 이 곳의 사람인 양 느껴지기까지 했다. 의구심을 드리우기보다는 고민을 빼어 든 것이 딱 그러하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이미 나는 알고 있다는 듯, 사선으로 조금 떨어지는 시선. 멎은 걸음. 자신의 연구원증은 아직 사용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였으니 굳이 들어서려면 사람에게 묻고 물어 열쇠를 들어야 하는가…… 같은 고민을 했을까. 어떨까. 외부에서 아무리 사람을 살핀들 이에 대한 이해는 완벽할 수가 없다. 사람은 어디에서나 지나고, 발을 옮기며, 제 할 일을 위해 움직이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한다. 부산스러운 곳이 아니라 할 수는 없겠지.

 

우츠기 란기리는 생각했다. 단순히 지나치려던 걸음이 마치 누군가 당기기라도 했다는 양 느껴진다. 가벼이 뒷덜미를 잡아 당겨진 사람과도 같이. 도로 물린 걸음은 소리도 없이, 가벼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며 선 남자의 곁으로 다가섰다. 시선을 한 번 환기한 그는 인사를 위해 입을 열고자 했다. 분명히.

 

“아, 내가 걸음을 멈췄을까.”

 

무테이는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양 말했다.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은 채였다. 달리 소리가 나진 않았을 텐데. 그리 기척을 드리우고 사는 사람도 아닌데. 기민한 것일까, 예민한 것일까. 저울 위에 굳이 올려다 추가 기우는 방향을 볼 생각 따위는 없으면서도. 귓바퀴를 더듬는 듯한 낮은 목소리는 어쩌면 부자연스러웠고, 동시에 자연스러워서 란기리를 가벼이 흔들어다 두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쉬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려는 것만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할 수나 있었을까. 그가 아니면 모를 일이다. 있다 해도 달리 어찌 하겠는가. 그 행위자는 하라다 무테이였는데. 무언가 뒤틀리거나, 어그러지기 전까지는 그의 모든 행동에 대해 기꺼이 눈을 가릴 생각도 없잖은 남자는 참으로 자비로운 배우와도 같은 법이다. 선선히 끄덕여지는 고개와 함께, 주욱 몸을 빼어내는 체를 하며 문으로 시선을 돌린 란기리가 말했다.

 

“무엇을 그리 보고 있나?”

 

문이 대단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야. 의문을 고스란히 담은 목소리에 그는 서늘할 정도로 다정한 웃음기를 드리우며 몸을 돌린다. 사실 이미 아는 자리를 바로 묻지 않고, 이리 구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고. 그걸 모르지 않을 남자에 앞에 두는 건 어쩌면 설레는 일이다. 단순하게…… 단순하게 스칠 수 있는 건 너무나도 많으니까. 그런 건 진부하고, 사람 역시 그의 눈에는 든다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마치 백지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이상하다. 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든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말하지 않은 것 아래에는 무수하게 많은 것들이 말하고 있노라고. 덮어다 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살피는 형태로 드러내며 돌리는 눈은 참, 의미심장해.

 

“이 너머에 있는 것을 도통 알려주지 않더군.”

 

어째서일까. 시를 읊어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에 어째서 압운을 두느냐 묻고 싶어질 지경이라. 란기리의 고개는 자연스레 옆으로 돌았고,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무테이는 의문을 담은 사람의 표정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깨끗할 정도로 담담한 구석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그의 특질로 정의하면 그 뿐이다. 어색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 저 너머에 무언가 까맣게 뭉친 ‘무언가’ 따위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 믿는 어쩌면 담담한 오만의 행위. 하지만 뭉뚱그리기에는 그보다 더 아까운 일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분명, 그럴 수 없는 사람이리라고. 눈에 담는 순간 알아 차려버리는 본능 단위의 흥미. 수용. 또……. 그렇다면 여기서, 지금 이 앞의 이는 어떻게 여겼느냐 묻노라면. 하라다 무테이의 시선은 조금은 가늘게 떨어질 뿐이다.

 

“무테이, 자네의 권한을 조절하는 데에 시간이 걸려 그래!”

 

새로 사람을 들이는 건 익숙하지만, 그만큼 나는 인원도 많거든. 이번에 자네가 오게 된 이유 또한 그렇지 않나? 설명하는 음성은 어느 정도는 동의를 구하는 모양을 한다. 빠르게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정리할 게 산더미라 인력난인 모양이니 조금만 참아줘. 설명조인 듯, 아닌 듯, 어느 정도 양해를 구하면서도 목소리는 가벼운 리듬을 이룬다. 이내 끄덕이던 고개는 드러나는 턱선을 따라 고스란히 멈춘다.

 

“이런 일이 많은 건가?”

“그렇지는 않지!? 자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들었네.”

 

위험한 일인 만큼이나, 모두를 데려올 수도 없지. 자네를 다시 만나게 된 순간에 감사하고 싶을 지경이야! 이리저리 사람이 오가는 복도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크기를 높이는 목소리는 우츠기 란기리의 입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는 그렇군, 하며 단적인 대답을 내려다 둔다. 다시 만나 반갑다는 인사와 구구절절한 이야기 따위는 이미 며칠 전에도 끝난 이야기였으니, 이쯤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반응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붉은 시선이 느릿하게 백지로 채워진 알림판을 바라보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하니 만족할게.”

“물론 그럴 거야!!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지금 들어가고 싶은 걸까?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면, 도움을—— 말은 차마 이어지기도 전에 토막이 나고 만다. 물론 주고말고! 잠시, 흰 가운 안을 뒤적거리던 손이 작은 카드 한 장을 꺼낸다. 가볍게 긁어내면 열리는 문의 너머는, 열지 않는 이유가 엄연히도 있었지만 란기리는 이에 대해 아무래도 좋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다 아는 듯한 눈은 백지의 의미를, 그 아래 적혀 있을 것들에 대한 의미를 충분히 골몰하고 생각했으리라. 모르는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자격을, 그는 그 호기심 하나로 취득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소유되어버린 사유의 산물을 손에 쥘 자격이 있지 않나.

 

가벼운 고민이라 할 수 있을 법한, 찰나의 머뭇거림은 분명 시야에 담겼을 테지만. 그마저도 어쩌면 충분한 일이다. 그래, 그대라면. 부러 혀 위에 올린 문장은 무테이를 향한 것이다. 안내하기 위함이라는 양 안으로 들어서는 걸음은 분명 넓지는 않았으나, 무테이는 뒤를 비슷한 속도로 좇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잠금 상태로 돌아가는 알림이 울렸다. 어쩌면 느른한 시선이 안을 훑었다. 내부는 하얗고, 하얗지만, 노랗기도 하며 붉기도 한,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검기도 한…… 종이와 종이의 군집의 모양. 실로 엮인 것인지, 접착제를 붙여서는 눌렀을지. 또 다른 것으로 엮인 것인지는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길게 늘어선 서적들의 사이는 흔한 서재나 도서관을 연상시키면서도 매캐할 정도의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 아래로 깔리는 어딘가 녹이 슨 철분의 향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테이의 미간은 구겨지지 않았다. 숨을 짧게 들이고, 갇힌 공기가 아닌. 어떻게든 팽글팽글 돌아가는 환풍구의 어렴풋한 소리를 느끼면서도 건재하다 싶을 정도의 묵은 향내가 기도를 건조하게 긁었다.

 

웃는 낯의 남자는 주위를 길게, 곡선을 그리듯 둘러보는 눈길 하나에도 순간을 잡아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역은 끝났으니 안심해도 좋아. 여기에 놓인 모든 이들을 소개하지!! 두 걸음의 앞, 반 바퀴 돌아 무테이를 돌아보는 몸짓은 어딘가 조금 극적이라 해도 충분했으리라 여길 부분이었다.

 

“모든 실패의 잔재와 사유한 결론의 끝, 실패가 소유한 과거의 행적이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 뿐인 터라, 이름은 붙지 않았지! 여기에 놓인 것들은 모두 제거되었음을 무테이, 자네가 이해 해주길 바랄 뿐이야. 사실 이미 예상하지 않았느냐 묻는 듯한 엄연한 시선이 남자를 향한다. 그는 부정하지 않았음을 란기리는 이해했다.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오히려 그 짙은 소독 연기의 냄새에 오히려 자신을 파묻을 것만 같은 행위와 흡사하게도 보였다. 뻗은 손이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기록, 군집을 들어 당겨냈다.

 

책장에 육중한 것이 눌려 끌리는 소리가 났다.

 

팔락, 팔락, 길게 뻗은 손 위로 페이지가 넘어가는 모양을 바라보던 그는 옆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백야와도 같은 침묵 사이에 종이와 종이의 마찰 소리만이 여실하게 드러날 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은 이상하게 순간을 길게 늘여다 두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 터인데도, 저 곳만이. 어느 한 지점. 어느 남자가 서 있는 곳만이 유리되어 다른 흐름으로 넘실거리는 듯한 절로 일어나다 만다. 란기리는 절로 시야를 흐리는 감각에 손을 넣고 휘젓고자 하는 충동을 고스란히 씹어 삼켰다. 무테이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글씨를 읽고 있는 건 맞는지, 그마저도 조금은 착각이 들 법한 정적이고도 가지런한 목소리가 흐려진다.

 

“어찌하여 책이었을까. 그것이 어울린다 여겼나?”

 

마지막의 형태를 담는 데에는 말이야. 펜을 쥐던 남자의 물음은 어쩐지 무겁지만, 그렇게 침몰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또 아니었던 터라. 그는 손을 넣어 비집고, 휘저어내는 대신 조금 옆으로 걸음을 옮긴다. 매캐한 향은 이미, 사실은 익숙한 종류였다.

 

“자네의 표현이 맞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렇게 여겨진다면 그렇게 되었지? 오히려 반문을 내는 목소리는 여상하기까지 하다. 흐음. 무테이는 골몰하듯 입을 다물지만, 그러한 태는 드러나지 않았다. 이어 묻는 건 란기리의 몫이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엮여서는 책의 형태를 이루지 않나?”

 

이건 작가에게 묻는 말인가. 의사와 학자의 자격으로 여기에 선 남자는 놓고 온 만년필의 감촉을 잠시 되새긴다. 하하하, 가볍게 흐트러지는 웃음소리는 어쩌면 유쾌하기까지 한 듯 들려왔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의 책이 될까.”

 

무테이는 말했다. 참으로 감상적인 말이라고, 아마 이전의 연구 참여자 중 한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일이 있었더라면 그리 내켜라 하지 않았겠지만. 동조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만 그에게는 정말로 어떠한 힘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를 두고 사람은 어쩌면, 홀렸다는 표현을 쓰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소유되고, 사유의 끝을 실패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건지 궁금해졌어. 탁, 소리가 나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종이 뭉치가 비지 않은 공간을 가득하게 채워 울려낸다.

 

란기리를 지나, 당연하다는 듯 그 안의 문을 발견한 무테이는 성큼성큼 발을 옮겨 문고리에 손을 올린다. 카드를 대지 않아도 열릴 수 있도록 둔 원시적인 문고리가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막지도 않으면서. 열어버린 문 안은 캄캄한 칠흑이다. 빛이 그 안으로 모조리 흡수 당하고 있는 건 아닐지. 그런 착각마저 조금은 명백하게 들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착각을 하고 있노라면, 뒤에서 따라 옮긴 남자는 그에게 속삭이듯 말할 뿐이다. 드러나지 않는 스위치 위로 손을 올린 남자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테이, 자네의 비위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좋기를 바랄 뿐이야.”

 

동료들이 불행한 사고를 맞이하고, 만일 이전에 우리에게 무언가 남기겠노라 말한다면……. 말이 흐려지듯, 완급을 조절하고는 이야기한다. 그들이 남긴 것을 보관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목소리는 그럼에도 참으로 어딘가 높고, 밝기까지 했다. 달칵,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멀리서부터 켜지는 조명은 백열등도 무엇도 아니다. 은은하게 내리는 빛은 엄연히 그 안을 비추면서도, 온전한 듯 온전하지 않은 것들을 고스란히 눈에 돌려주고 있었다.

 

안으로 뻗는 걸음은 무테이의 것이다.

 

우츠기 란기리는 그 순간 파편과도 같은 지나간 이들 사이에 놓인 남자가 지독하게도 잘 어우러진다는 착각을 하고야 만다.

 

아니, 착각이 아니지. 그것이 현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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