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 연성,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 칼리플란. 현대 메디컬 AU.
조금 길이 막힌 덕인지, 탓인지. 한산해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춥지 않도록 적당히 안쪽에 자리를 안내받아 몸을 앉혔다. 목도리를 요령 좋게 풀어낼 줄은 알면서 왜 묶는 데에는 서투신가, 하는 생각을 괜히 흘려낸 칼리안이 메뉴판으로 제 시선을 슬쩍 옮겨냈다.
오는 길에 이미 한 번 본 건 거의 잊지도 않으시는 분 덕에 식후 음료만 차로 다시금 골라 주문한 두 사람이 그제야 조금 숨을 돌렸다.
“그래서. 오늘은 좀 괜찮으신가.”
피곤하지는 않으냐 묻는 말에 가까웠지만, 오늘도 미룰까 말까. 잠시 고민할 정도로 피곤했던 탓에 거짓말을 하면 티가 참 잘 나는 남자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풀리지 않는 게 하나 있어서요. 라고 말하기는 했다지만 정작 그걸 말한 적은 없던 탓이었다. 말해서 좋을 것도 없고, 진단을 내린 내과나 병력으로 방문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응급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으니까. 그가 글쎄요, 하고 짧게 말을 흐렸다.
“제가 괜찮았다고 하셔도 어련히 우리 형님께서는 알아보실 테고. 그러면 그냥 조금 피곤했다고 하는 게 맞겠죠.”
“응.”
“거짓말 저 그렇게 티 납니까? 나름 한다고 하는데.”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딱 떨어지는 대답에 그런가요. 하고 웃은 칼리안이 식전 수프와 방을 그의 앞으로 조금 더 밀어주면서 잔에 물을 따랐다.
“풀리지 않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풀렸기 때문에 어려운 것도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다들 머리 쓰느라 바빠서요.”
언제나 머리는 쓰고 있는데, 그게 한 번 꼬이면 머리가 아프잖아요. 그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꼬인 거죠.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 아무런 일도 없다고. 어려울 거 없다고. 여상한 일인 양 말을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이미 두 번이나 밀렸던 저녁 약속 덕에 잘 알고 있었던 플란츠가 그저 칼리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도 시선을 거둬내며 내렸다. 스푼을 들고 수프의 온도를 살피고, 뜨겁지 않은 정도로 딱 괜찮은 수준인 것을 가만히 보던 그를 칼리안이 조금 소리 없이 웃으며 지켜보았다. 나쁠 건 없어 보였다. 녹색인 것만 빼고. 꼭 비슷한 색의 눈을 하고 있던 그가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입으로 스푼을 옮겼다. 칼리안이 후추를 살짝 얹으며 휘휘 섞어냈다.
“이거 브로콜리 아니면 완두콩이겠네요.”
“전자.”
“입자가 고운 거 같아서 우리 완두콩 같은 건 줄 알았는데.”
괜히 가벼운 목소리를 낸 칼리안을 바라보며 플란츠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다가도 다시금 손을 움직여 별다른 말없이 수프를 먹었다. 원체 말이 짧기도 했고, 굳이 무어라 말하는 것을 신경 쓰는 것도 같았다. 말 대신 삼킨 수프는 식전에 먹기에 적당한 가벼운 맛이었다. 입맛 정도는 돋굴 수 있는. 그러나 신경이 전혀 다른 데에 쏠려 있는 것도, 피곤한 것도 어련히 잘 알고 있었던 탓에. 플란츠는 제 눈 색과 퍽 빼닮은 수프를 들여다보는 대신에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응급센터 관할 아니시니까 말씀드리기 좀 그런 거 아시면서.”
“너 계속 반말하는데.”
“아시면서요. 그리고 뭔가 말씀드릴 법한, 정말 거창한 그런 게 없습니다. 이미 다 나와 있어요. 뭐가 문제고, 어떤 모순이고, 그 어떤 모순이라는 게 결국에는 또 모순이 될 수 없는지. 다 열린 이야기입니다.”
부족한 게 없는데 저희는 확신할 수 없어요. 이게 맞나, 하고 생각하는 게 모호합니다. 분명히 아는 사실이지만 답을 적어내리지 못할 때가 있잖아요. 시험에서 3번 이장 같은 객관식의 알파벳이 나오는 것처럼요. 칼리안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론은 보이지 않도록. 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숨기지는 않겠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플란츠는 그 말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제 스푼을 옮겨냈다. 실례합니다, 하는 말이 제삼자에게서 들려왔다.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문 채로 멈췄다.
갑자기 뭔가 먹으면 속이 편하지 않으실 거 같다는 이유로 저 좋아하는 것 중에서도 육류도 잘 들어가 있고, 야채도 많이 들어간 스튜 중에서도 포토푀가 낫겠다는 의견 취합의 결과인 수제 소시지와 버섯. 당근과 양파에 브로콜리. 잡내를 잘 제거한 양고기를 넣은 양배추 스튜와 깡빠뉴의 속을 파낸 버섯 크림 파스타 빠네. 맛이 순한 루꼴라에 로메인. 무순과 한입 크기의 방울토마토, 비리지 않게 훈제된 연어를 아주 살짝만 익혀 프렌치 소스에 버무린 샐러드가 가지런하게도 테이블 위를 채웠다. 다시금 두 사람만이 남을 무렵이 각자의 몫으로 나온 스튜를 조금 더 가까이 밀어주고, 제 것을 앞에 둔 칼리안이 말했다.
“형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이유가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튜가 앞에 밀어졌든 말든. 샐러드가 담긴 오목한 접시에서 샐러드만 제 앞 접시로 옮겨온 그가 포크를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은 돌아왔다.
“아니.”
참으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게 딱 플란츠다운 대답이어서, 뻔히도 이렇게 대답이 돌아올 걸 어련히 알았던 탓에, 칼리안이 조금 웃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그렇지. 이유가 없는 일이 있을 리가 없다고, 저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 없는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 있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하니까.”
칼리안은 오래 푹 끓여서 말랑말랑해진 포토푀의 양고기와, 잘 익어서 포슬포슬해진 당근을 입에 넣었다. 당근이 아직 조금 뜨거웠지만, 맛이 있어서 그런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을 건 먹고 생각해야지. 그런 탓에 잘만 넘겨 삼킨 후에야 도로 입이 열렸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을 드릴까요. 형님 머리를 빌리고는 싶은데, 그 안에 좋지 않은 걸 남길 수도. 응급실 관련도 아닌데 짐을 지워드리거나 외부인을 끌어들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머리 좋은 형님께 가정을 내어드리는 정도로 봐주세요.”
저도 제 일이니까 감수하는 겁니다. 어련히 조금만 돌아가도 들을 수 있을 것을 막아둠과 동시에, 쉬는 날에도 일 이야기를 해야 하는. 그것도 제 일이 아닌 것을 논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셈이라. 그게 못내 미안했던 터라. 그는 면이 서로 들러붙기 전에 소스가 넉넉한 빠네 파스타를 전용 집게로 집어다가 앞 접시 중 하나로 옮겨왔다. 포크가 돌돌 말리는 소리를 내고, 아삭, 아삭. 조용하게 채소가 씹히는 소리가 났다.
“모두 다 열린 상자 안에는 무언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훔치기 위해서든, 그게 있으면 무얼 얻을 수 있어서든. 상자 자체에는 목적이 없을 수도 있지만, 상자가 열리는 것 자체에는 목적을 둘 수도 있는 상황이 있습니다.”
“열지 않으면 안에 든 게 뭔지 모르니까.”
플란츠가 끊어지는 온점을 따라 말을 매달았다. 칼리안이 버섯과 면을 호로록, 입에 넣었다. 입에 뭔가 넣고는 말하지 않아야 예의고, 바쁜 것도 아니었으니 그는 꼭꼭 씹어다가 넘긴 후에야 말했다.
“그것도 그렇고, 정확히는 상자를 여는 게 목적은 아닐까 싶어요.”
연어와 루꼴라가 한 포크에 나란히 꽂힌 채 작은 입에 들어갔다. 느긋하게 씹고, 음미하는 식사. 그러나 머리는 빠르게 돌고, 또 돌아서. 금세 결론 비슷한 걸 내어놓고 있었다.
“상자를 열면 이득이 돌아올 사람이 있는 모양이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누구든 이득이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득이 있으니까 상자가 열렸겠죠? 비유하자면, 이 상자는 판도라가 아니라 페르세포네의 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프로디테가 부탁해서 프시케가 받아왔던. 무언가 ‘목적’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열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탓인가, 저희는 그 프시케인지 아프로디테인지 모를. 그 사람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칼리안은 속을 파낸 깡빠뉴의 부드러운 빵 위에 샐러드를 얹었다. 샌드위치 비슷한 맛이 나려나, 했더니 프렌치 소스 덕인지 조금은 심심한 맛이었다. 딱, 플란츠가 좋아할 거 같은 맛이라 그나마 만족이었다. 스푼을 들어 다 무른 양배추와 몰랑몰랑하게 익은 양차를 한술 떠 입에 넣은 플란츠가 시선을 굴렸다. 어련히 알아들었는지 반문은 없었다. 그렇겠지. 누군데, 저 사람이. 그가 답을 가만히도 기다렸다. 이걸 굳이 말해야 하나, 를 말을 내면서도 생각이 들었다지만 이미 내어뒀으니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도중에 끊으면 알아서 알아차려 버리실 분 아니냐고. 합리화인가? 그는 조금 입안이 쓴 게 루꼴라의 맛 때문인지, 저의 기분 탓인지를 알 수 없었다.
“연 다음에.”
짤막한 말에 칼리안이 눈을 깜박였다. 연 다음에, 아프로디테와 프시케의 차이는. 시선이 느른하게 굴렀다.
“프시케가 아니겠네요. 프시케는 죽을 뻔했죠. 영원히 잘 뻔했으니까.”
“응. 아프로디테. 그리고 페르세포네랑도.”
순하고 동글동글한 완두콩의 말이라 여겨서 그런 건지, 외모에 비해 낮다 싶은 편인 목소리가 유연하게 들렸다. 페르세포네랑도, 아프로디테가. 전승에 따라서 생각하자면 마찰은 있을 수 있을 터였다.
“프시케와 페르세포네는 별로 연관 없어. 상자, 원래 아프로디테가 받아야 할 거 아니었나.”
“신과 인간의 차이이기만 한 거라면 모순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차이라면 비유에서도 모순이 생길 테지만, 그러지 않겠느냐고. 칼리안의 물음에 양배추를 한입 크기로 잘 잘라다가 입에 넣은 플란츠가 시선을 굴렸다. 무언가 떠오르지 않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정리하는 행위에 가까운 편이었다. 레몬의 향이 남는 물을 한 모금 넘기고, 대답이 이어졌다.
“아프로디테는 미의 여신이고,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 빌려오라고 했지만, 프시케가 갔지. 프시케에게 아프로디테는 좋은 마음이 아니었고. 페르세포네는 전승에 따라 다를 텐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보면. 가운데에 있는 프시케는 페르세포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내쳐도, 상자를 열어도.”
보기 드물게 길게 말을 내어둔 플란츠의 말에 칼리안이 즉답처럼 말에 꼬리를 물었다.
“아프로디테에게는 프시케를 제거하는 이득이 될 수도 있겠네요.”
“응. 이득이지. 아프로디테면. 어느 쪽이든.”
어련히 치환할 것도 많은 사람이, 비린 것도 잘 못 먹으면서 피 냄새는 허구한 날마다 날 수밖에 없는 곳만 골라서 전문이고. 진상이란 진상을 다 만날 수 있는 응급실에서 센터장까지 하는 편이라 저 역시도 만만찮게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은. 그런 사람이 내린 결론이라서. 괜한 말을 했나, 하고 생각하다가도 결국에는 답을 어렴풋하게 알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칼리안이 들어차는 미안한 감정에서 숨을 돌렸다.
“형님 말씀은 이해했는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저희는 프시케가 상자를 가지고 오기 너무 쉽다고 생각되고 있어서요.”
조달이 쉽다는 이야기였다. 프시케가 운반책이라면, 그만큼 접할 수 있는 건 확실하지 않겠느냐고. 그런 의미의. 플란츠가 시선을 옮겼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남들이 노래하는 서정시에나 설화에 근거하면 그렇게 보여서?”
칼리안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반말.”
“보여서요. 괜한 추론은 아닙니다.”
“아닌 거 같은데. 너희, 생각을 과하게 하는 거 아닌가.”
“와아, 그걸 플란츠 브리센이 말씀을 하시네요.”
“야.”
즉각적인 반응에 칼리안이 작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플란츠가 포크를 내려놓고, 조금 잘라야 할 것 같은 빵의 덩어리를 집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두 쪽으로 찢어진 하얀 빵의 결이 생각보다 질긴 것도 같아 보였다.
“상자 조달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조달만 하는 사람과, 원하는 사람을 헷갈리지 말고. 플란츠는 의문을 토해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양.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왜. 왜를 아는데 왜 모르는 건지 나는 오히려 모르겠는데.”
“이 이야기가 좀 의도된 거 같다는 생각을 져버리기 힘들기 때문, 이네요. 그런 느낌이 계속 가시지를 않습니다. 심증이 엇갈려서 풀어내기에 어렵습니다. 영원한 잠에 빠질 수 있는 상자의 무게는 크니까요.”
칼리안이 버섯을 낼름 입에 넣었다. 딱 먹기 좋게 식은 채였다. 샐러드만 먹는 플란츠의 앞으로 파스타도, 빵도 부드러운 부분을 잘라다가 내어놓은 그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의도된 거 같은데. 그럼 의도는 누가 하나. 이득. 생각한다며.”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빗겨나갈 수 있는지를 아는데 왜 계속 빙글빙글 꼬인 채로 있느냐고, 그런 말이었다. 과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플란츠가, ‘그’ 플란츠 브리센이 말했다. 그렇다면 더 깊게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라는 걸 그는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미 나온 답을 더 골몰하느라 파헤치는 셈이 되어버리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던 플란츠가 피곤하다는 양 스튜만 몇 스푼 더 떠 마셨다. 칼리안이 웃음기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생각해서 그런가?”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칼리안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조금 전에는 혼잣말이었는데.”
조금 전에 물론 반말한다고 지적했다 해서 그걸 냉큼 들어주고 싶은 기분은 아니어서. 당신이 할 소리인가 싶어서. 괜히 완두콩 한 번 쿡 찔러본다는 느낌으로 말하자 플란츠에게서 즉각 반응이 돌아왔다.
“그만 짖으라고 했는데.”
나름대로 적당히 놀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인내심을 세 번 다 쓴 거 같았다. 그만 놀려야지. 응. 칼리안이 예쁘게 웃었다.
“혼잣말이었다니까요. 봐주세요. 그래도 너무 생각해서, 라면…. 저희도 조금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확실히, 골몰하길 바라는 거 같았네요.”
조금만 어긋나도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이 있으니까요.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할까요. 느른한 목소리가 번졌다. 본래라면 저녁만 먹고 들어가서 영화라도 한 편 보고 루시랑 안네도 놀아주고, 겸사겸사 같이 껴안고 잠이나 잘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영화를 볼 수 있을 거 같은 기분도, 기력도 아닌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떨쳐 놓는 게 확실하게 이득일 거 같은데.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저야 다시 돌아가도 괜찮다지만, 이미 저 한 번 데리러 온다고 한 시간을 자다 깨서는 멍하니 바깥에서 서 있던 사람에게, 차마 오늘 쉬는 사람 병원까지 다시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을 하기도 좀 그래서. 별다른 소리를 내지는 않은 채로 일상적인 화젯거리나 내어두던 칼리안의 말을 가로막은 플란츠의 포크가 돌돌 말렸다. 파스타, 식어가면서 조금 소스가 굳은 거 같았다. 따뜻하게 밑에 데울 거라도 달라고 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플란츠가 덤덤하게 말했다.
“가는 길에 들러.”
아, 이것도 들켰나 보다. 생각하는 거 티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과 뭔가 숨기는 것이 생각보다 유사한 부분이 많을뿐더러 유난히 플란츠의 앞에서, 그러니까 제 형님. 제 연인 앞에서는 물러진다는 걸 전혀 스스로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던 탓에, 플란츠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저걸 숨기려고 숨기는 거냐고. 다 보이는데. 물론 본인이 예민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차치한 채였다.
“저 그러자고 말한 적 없는데.”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가 비어있는 손으로 제 얼굴을 톡톡 건드렸다.
“얼굴.”
표정에 보였다는 말이었다. 제가 저도 모르게 말로 뱉었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고 얼굴에서 티가 났다는 게 조금 인정할 수 없어서 그가 말을 조잘거렸다. 당연하게도 부러, 조금은 더 가벼운 것을 내어두는 건 당연했다.
“아, 형님. 이건 치트 아닙니까. 어떻게 얼굴만 보고 제가 그런 생각 하는 걸 아세요. 사실 독심술 쓰시죠.”
플란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 말하지 말고 밥.”
“지금 깨작거리고 계신 게 누군데 저한테 밥 이야기를.”
저 오늘 형님 저녁 사 드리고 제대로 먹인다고 카드 들고 오면서 마음 제대로 먹었다고요. 칼리안이 조잘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말한다고 평소보다 잘 챙기지도 못한 것 같아 보이는 주제에 저는 안 챙기고 한다는 소리가 참 기가 차서. 플란츠는 저희 가기 전에 카페라도 들를까요. 하고 꼬리를 빼 무는 칼리안의 물음에 아니, 됐는데. 하고 단칼에 잘라냈다. 에이, 하는 목소리를 내었으나 칼리안은 그제야 제대로 포크와 스푼을 고쳐 쥐었다. 이제 좀 마음이 풀렸으니 어쩌겠느냐고. 저녁 먹어야지. 그럼.
“형님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칼리안이 최고로 꽃 같다고. 부검실이 아니라 세미나 나갈 때에는 참 잘 먹히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보다 만만찮은 얼굴을 하고 계신 덕에 전혀 아무렇지 않으신 건지. 네가 그 정도 애교를 언제는 안 떨었느냐 물을까 말까를 고민하시는 건지 그의 형님께서는 툭, 이번에도 단칼에 잘라냈다.
“알아. 일해.”
참, 제가 보기 좋으라고 애교까지 떨었는데. 일이랑 저 중에서 뭐가 더 중요하세요, 하고 물어봤다가는 그런 말 할 거면 옷 벗고 일 사직서 내라고 할 거 같은 분이 하는 말이라서 차마 반박하지도, 더 장난으로 말을 매달지도 못해서. 칼리안은 일 앞에서 유난히도 매정한 응급센터장님을 바라보며 웨이터를 불렀다.
뭐라도 더 먹어야 머리도 돌지. 그럼.
'AM 00:00 심야식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야식당 자유오더 SAMPLE 6 (0) | 2022.06.10 |
---|---|
심야식당 자유오더 SAMPLE 5 (0) | 2022.06.10 |
심야식당 자유오더 SAMPLE 4 (0) | 2022.06.10 |
심야식당 자유오더 SAMPLE 3 (0) | 2022.06.10 |
심야식당 자유오더 SAMPLE 1 (0) | 2022.06.10 |